2013년 10월 29일 화요일

20131029 큰말하기 대회를 다녀와서



우리는 서로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자신에게는 더 다정한 내가 되자. 

내가 겪었던, 그 외롭고 슬픈 시간을 보내고 있을 이를 위해 
더 크고 더 열심히 소리 높여 말하자. 

우리의 목소리가 그들에게 닿을 수 있게
이렇게 물처럼 서로를 향해 가자.



 

2013년 10월 21일 월요일

우연히 카메라 메모리를 정리하다가


작년 5월 북서울 꿈의 숲




작년 8월 초 제주도 사계리 버스를 기다리며




천지연 폭포 앞 바다




성산 일출봉에서 




섭지코지 바다 위 




어딘지 기억이...




역시 어딘지 기억이 안 나지만 우연히 만난, 귀여운 꼬마아이.
"안녕?" 했더니 수줍어 하다가 "안녕하세요." 하더라.




해 떨어지는 걸 쫓아다니며,
 희선 언니와 희중 언니 딸. 




역시 해 떨어지는 걸 찍은 것.
다만 거꾸로 찍어서 더 아름다운, 하늘.




산방산 보문사 




사려니 숲길 
이 당시 나는 너무 우울한 상태였는데 꽤 오랜 만에 신나게 웃었다.




어딘지 기억나질 않지만, 
어쨌든 해질녘 제주도 목장 앞에서.


올해 10월, 선암사 마당의 떨어진 꽃들.




선암사 근처 전통차체험박물관의 수반. 




다례체험관의 한 켠.




다례체험, 정갈하고 소박한 시간.

오랜만의 정식 규방다례라 재미있었다.
고등학교 때 마지막으로 배웠던 것 같은데...




새벽 같이 일어나 순천만 근처 논길을 가로질러 찍은 해돋이.




수동 정류장에서의 나.
순천 여행의 마지막.




제작년 여행 갈 때 출국 전날 급히 산 카메라는 
여행 다닐 때마다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다.

특히 이렇게 오랜만에 카메라 메모리를 정리하는 때에는 .


손에 잡힐듯 말듯한 장면들, 
나의 감각이 닿아 있는 찰나의 순간들, 

웃음이 터진 나의 행복한 얼굴. 


2013년 10월 14일 월요일

10대의 몸 변화를 새롭게 이해하기

- 이 글은 (사)성남여성의전화 아동/청소년 인권강사 양성교육 중 제가 진행한 '청소년 변화와 성 심리1: 생리, , 이미지' 원고를 발췌한 것입니다. 



사춘기, 청소년 혹은 10대라 불리는 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남들에게 보이는나 즉, 타인의 시각을 인지하고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자신의 몸이 변화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는데 이와 더불어 타인의 평가가 내려지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는 10대의 변화하는 몸에 대해서 알아보고 기존의 통념이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래서 왜 새롭게 10대의 몸 변화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월경*()의 시작

자궁을 가진 여성의 경우, 10(혹은 10대 이전)에 월경을 경험합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분위기에 따라 혹은 어떤 성교육을 받아왔느냐, 자신의 몸에 대한 이미지는 어떠한가에 따라 월경을 시작하는 여성이 이를 받아들이는 느낌과 감정 역시 달라집니다.

일반적으로 성교육 혹은 생물학에서는 월경을 임신(정자와 난자의 수정)의 실패에 따른 결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현재 여성의 삶에서 임신은 전 생애를 통틀어 1-2(혹은 그 이상, 그러나 전체 월경 횟수에 비하면 1%에 못 미치는 아주 미미한 횟수임) 경험하는 매우 특별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외를 기준으로 월경 전체를 설명한다면 여성은 계속해서 1달에 한 번, 제 주기마다 실패를 경험하는 존재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또한 임신은 현재의 가족 구조에서 이성애 관계를 가정하고 여성의 역할을 재생산에만 한정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으므로 임신/출산 계획이 없는 여성이나 난임 여성에게는 차별적인 설명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월경을 임신의 실패가 아니라 여성이 첫 월경부터 마지막 월경 시기까지 경험하는 인체의 순환 작용이라고 설명합니다.

여성은 초경을 주변에 알림으로써 여성되기과정에 진입합니다.  '이제 여자가 되었구나!'라는 주위의 반응에 어른이 되었다고 기뻐하기도 하지만 넌 이제 몸 조심을 해야 해라는 단속이 시작되면서 이제부터 언제든 임신할 수 있는, 통제가 되지 않는 몸이라는 것에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월경이 시작됨과 동시에 겪게 되는 월경통은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자신의 계획대로 제어가 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인들이 월경을 새롭게 해석해 설명해 주고 이것은 통제를 벗어난 상태가 아니라 월경을 통해서 자신의 몸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됨(예를 들어, 월경 주기나 월경 혈의 색 변화를 통해 자신의 건강이나 심경을 진단할 수 있음) 혹은 몸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 일반적으로 월경은 생리라는 단어로 지칭됩니다. 하지만 생리는 생리작용의 준말로 인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순환작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보다 정확하게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신체 작용을 언급하기 위해 월경으로 바르게 부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2) 음경/고환의 발달


자궁을 가진 여성이 월경을 통해서 그 존재를 깨닫게 됨과 달리 남성 성기는 돌출되어 있기 때문에 음경, 고환이 발달하거나 몽정이 시작되기 전부터 남성들은 자신의 성기와 친해지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통과 의례처럼 시행되는 포경수술로 특정 형태의 남성 성기만이 아름답다, 혹은 옳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성 성기와 마찬가지로 남성 성기 역시 다양한 형태와 모양, 색깔을 가지고 있으며 반드시 이 수술이 필요한 것도 아님을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샤워 등을 할 때 포피가 자연스럽게 벗겨져 오줌 찌꺼기를 제거할 수 있어 청결 유지가 가능하고 염증 발생이 적다면 포경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포피를 벗길 때 아픔을 느끼거나 잦은 염증으로 고생한다면 포경 수술이 좋은 해결책이 될 수도 있습니다.

   10대 남성들은 성교육 시간에 일반적인(평균적인) 남성 성기의 크기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사회 통념상 큰 남성의 성기가 남성의 (성관계 시) 능력, 자질을 결정한다고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성 성기는 평소에는 이완 상태에 있다가 발기를 통해 크기가 커집니다. 또한 흥분 정도나 건강 상태에 따라 발기 정도가 다르다는 점, 성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파트너와의 교감이지 크기가 아니라는 점, 성기 중심의 성관계 이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성관계를 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짚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발기하는 성기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있습니다. 성적인 요소로 자극을 받지 않아도 사춘기부터 남성 성기는 15분 정도의 간격으로 발기와 이완을 반복합니다. 또한 자고 일어났을 때, 추울 때, 특정한 냄새를 맡았을 때 등 다양한 상황에서 발기할 수 있으며 이는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발기하게 됐을 때 애국가를 부르는 등의 발기 상태를 이완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여 대처할 수 있도록 조언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10대 남성은 일상적으로 성기를 만지고 관찰하는 행위 외에 몽정을 통해서 자신이 성적 존재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속옷이나 이불을 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황할 수 있으나 몽정은 생산한 정자와 정액을 내보내는 생리적인 현상으로 몽정을 했을 때 휴지 등을 통해서 잘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오히려 몽정을 기다리고 이에 익숙해지는 시기가 올 수 있습니다.
 


3) 자위하기: 내 몸에 말 걸기

10대 이전에 자위를 시작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10대 시기에 자신의 몸 변화와 함께 자신의 성기에 관심을 보다 더 많이 가지게 됩니다. 10대 남성의 경우, 구성애 씨의 성교육을 통해 자위하는(할 수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졌고 또래집단과 함께 자위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하기도 하고 함께 자위하는 등 또래문화의 일부로써 자위가 받아 들여 집니다.

그러나 (10) 여성의 경우, 처녀막이 손상된다거나 순결을 잃는다, 여성은 성욕이 없는 존재다 등의 사회 통념으로 인해 자위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고 관심을 갖더라도 어떻게 자위를 해야 하는지 몰라 못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성기나 성감대를 자극하게 되고 이러한 쾌감을 탐구하게 된 여성들도 있습니다. 

자위는 성기를 직접 자극하는 것 외에도 자신의 몸을 쓰다듬거나 만지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몸에 변화가 생기는지, 자신의 성감대는 어디인지를 탐구하면서 몸을 탐험하는 시간입니다. 자위를 하면 할수록 자신이 좋아하는 스킨십 부위나 성감대 등을 알게 되는 등 자신의 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집니다. 

그래서 자위는 자신의 몸에 말을 거는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자 일상 중 하나입니다. 어떤 성교육 교재에서는 자위는 성관계할 파트너가 없을 때 성욕을 홀로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만 자위와 함께하는 성관계가 의미와 맥락이 다르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자위는 가장 쉽고 편하게 자신의 몸을 탐색하고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파트너가 있건 없건 할 수 있는 행위이며 자신이나 나의 파트너가 자위를 한다고 해서 자신/상대방의 성적 매력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즉, 자위를 통해서 자신의 성기와 성감대 등 몸을 탐색할 수 있고 성기 관찰을 통해 더욱 자신의 몸과 감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 수 있습니다. 다만,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이를 제어하는 것에 대해서 일러줄 필요가 있겠지요.
 


4) 맙소사, 그걸느끼기 시작했어요!: 10대의 성욕에 대하여

자위하기 시작하거나 성관계를 하기 시작한, 혹은 자신의 몸 변화를 탐색하는 10대는 자신의 성욕에 대해서 인지하게 되고 이를 더욱 자세히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아직 10대는 미숙한 존재이므로 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10대 역시 성적으로 활발한 존재이고 이미 성 행동을 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지나친 보호와 감시는 이들과의 소통을 막게 됩니다. 오히려 이들이 안전한 성 행동을 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개중에는 자위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10대도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자위란 자신의 몸에 대화를 거는 과정이고 자신을 더욱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이에 너무 몰두해서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를 스스로 알아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조언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상 'Porn Sex vs Real Sex: The Differences Explained With Food' ⓒkbreativelab



5) 변성기

일반적으로 변성기는 사춘기 남성에게만 일어나는 몸 변화로 알려져 있지만 변성기는 성별에 상관없이 일어납니다. 그 이전까지는 어린아이 목소리 즉, 성별 분간이 어려운 목소리를 내다 이제는 자신의 성별에 맞는 발성과 언어 사용을 요청 받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기대하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바뀐 목소리 때문에 고민을 하는 10대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목소리는 얼마든 높낮이나 발성법 등으로 변화를 줄 수 있으며 가장 큰 예로는 성악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성악에서는 노력과 연습으로 목소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주요한 자질로 언급됩니다. 물론 성악 이외의 세계에서는 여성다운, 남성다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자연스러운행동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어떤 목소리를 여성’, ‘남성으로 구분할 것인지 역시 자연스럽지 않은 판단임을 인지하시고 특정한 방식으로 여자/남자 되는 것에 고민이 있는 10대를 잘 상담해 주세요.


6) 가슴의 발달

월경 이외에 10대 여성이 자신의 몸 변화를 느끼는 계기는 가슴의 발달입니다. 이미 10대 이전에 가슴에 몽우리가 지며 유선이 발달하고 이 당시 가슴에 느껴지는 고통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자신이 여성의 몸을 가졌음을 자각합니다. 또한 남성이 자신의 성기 크기를 고민한다면 여성은 얼마나 큰(적당한 크기의) 가슴을 가질 수 있는가에 골몰합니다

모두의 생김새와 크기가 다르듯이 여성의 가슴도 그러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해 주시고 몸은 여러 단계를 통해 변화를 겪는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분수마사지라던가 가슴을 발달시키는 마사지를 통해서 가슴을 크게도 할 수 있으며 운동을 통해서 지방이 아닌 가슴 근육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혹은 임신, 출산으로 인해 가슴이 커지기도 하며 작아지기도 한다는 것, 즉 여성의 몸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이러한 불안감은 사그러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성 역시 가슴이 발달하게 됩니다. ‘봉긋한 가슴은 여성의 상징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이에 당황하는 10대 남성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성처럼 가슴이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필요한 만큼의 지방이 쌓이는 일시적인 과정임을 알려줍니다. 혹은 비만 등으로 인해 여성형 유방으로 발달하는 경우가 있을 경우, 보호자와 의사의 상담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게 합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어떤 몸이든 자신의 몸이므로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힘 기르기 방식이겠습니다. 



7) 털의 등장: 좋은 털, 나쁜 털, 이상한 털
                                  
사춘기 이전의 몸은 아주 가늘고 연한 털이 나지만 몸이 성장함에 따라 팔, 다리 이외에도 성기, 겨드랑이, 코 등에 굵은 털이 나게 됩니다. 특히 음모는 물과 먼지, 더러운 것, 추위, 벌레 등으로부터 성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음모와 겨드랑이 털을 비롯한 체모는 사춘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땀샘으로 인해 페로몬을 나게 하는데 체모가 이를 품고 있어 타인이 자신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합니다. 사람의 후각은 성적 본능, 성적 반응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잘 씻지 않고 속옷, 양말을 자주 갈아입지 않는다면 박테리아가 땀 속에서 자라 악취를 만든다는 것도 일러줍니다.

사람마다 음모의 색도 다양하지만 자신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으로 음모가 자랍니다. 또한 몸의 털은 한 번에 자라지 않고 팔과 다리, 손등, 겨드랑이, 어깨, 엉덩이, , 가슴 그리고 등 등 다양한 부위에 만 스무 살까지 점차 자라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털이, 얼마나 두껍게, 어떤 색으로 어디에 나는가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8) 연애와 성적 지향: 나는 어떤 사람이고 누구와 사랑할 수 있을까?



영상 '사랑만 있으면 돼?' ⓒTaylor Kim


10대는 이러한 몸의 변화와 더불어 타인과의 관계를 발달, 확장하는 것에도 신경을 쓰게 되며 연애에도 관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각종 매체에서 연애를 중요한 화두로 삼는 것도 원인일 수 있지만 부모 등의 양육 보호자 이외의 다른 관계를 만들어 가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10대 초반에는 연애에 대한 상상력이 없기 때문에 굉장히 이상적인 사람과의 연애를 꿈꾸기도 하며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은 애정표현을 낭만적인 것이라 인식하기도 합니다. 좋은 드라마나 영화, 소설, 만화 등을 통해서 10대의 연애에 대한 상상력을 높이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또래의 연애 이야기를 들으며 간접적으로 체험하기도 하고 상담해 주기도 하면서 연애하는 주체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무엇보다 연애라는 새로운 관계를 통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를 파악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자신이 원하는 연애, 가능한 연애에 대해서 고민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나는 누구와 사랑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됩니다. 대부분은 서로를 그리고 자신을 이성애자라고 가정하고 질문하지 않습니다만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도 질문하는 10대가 있습니다. 혹자는 10대 시기의 동성애적 정체성을 이성애의 연습이라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는 10대를 성적으로나 심적으로 미약한 존재로 바라보고 이성애만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시각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에 대해 관심이 높은, 자존감을 키우는 계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00애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은 항상 변화하며 지금 이성애자라고 느껴도 나중에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무성애자, 자기성애자 등 다양한 정체성을 횡단할 수 있음을 알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꼭 연애해야 성장할 수 있고 인생의 중요한 경험을 했다고 느끼는 이들에게는 연애든 삶에서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잘 돌볼 수 있느냐이며 이를 통해서 다른 관계로의 확장이 가능하다는 것,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은 연애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히려 외로움이나 관심을 위해 다른 사람과 만나는 사람일 수록 그 관계에서 더욱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가장 좋은, 가장 필요한 양육자가 되는 것, 이것이야 말로 관계 안에서 충만함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아가기의 첫 걸음입니다. 
 
 
 
 
 
 
참고/인용 문헌
 
김백애라·정정희, 준비된 부모를 위한 성교육 Q&A: 거침없는 아이, 난감한 어른, 파주:문학동네, 2011.

권터 아멘트, 섹스북, 이용숙 옮김, 서울:박영률출판사, 2012.

수샨 모브세시안, 사춘기 소녀, 윤운영 옮김, 아하!센터 감수, 서울:걷다, 2011.

제프 프라이스, 사춘기 소년, 손희정 옮김, 아하!센터 감수, 서울:걷다, 2011.

카림 르수니 드미뉴, 난 그것만 생각해, 김혜영 옮김, 곽이경 해제, 서울:()우리교육 검둥소, 2011.

 

2013년 10월 13일 일요일

가족을 선택할 권리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글을 써서는 안 된다. 남을 위해서도 써야 한다. 머나먼 곳에 사는 알지 못하는 미래의 여자들을 위해서 말이다. 우리가 전혀 영웅이 아니었음을 알게 하자. 다만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열정적으로 믿고 추구했을 뿐이다. 우리는 때로 강했지만 때로는 매우 약했다.


-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이 에세이는 지혜 선생님의 젠더연구입문 수업 과제로 작성한 글입니다.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늘 자신을 성찰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려 노력하는 자세를 가르쳐 주신 지혜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 에세이를 읽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깊은 위로와 지지를 해 준 친구들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저는 가족에 대한 페미니스트 분석에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사실 가족에 대한 텍스트만큼 재미없는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더니 가족만큼 ‘자연’스럽고 그렇기 때문에 변하지 않을 것 같고, 치열하게 싸우기 보다는 그 위력 앞에 무력해 지는 대상이 없더라구요. 그리고 가족에 대한 페미니스트 분석은 예리하지만 건조하고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저의 글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다른 페미니스트들의 글을 통해 그간 인식하지 못했던 사회 구조를 발견했을 때 받았던 놀라움과 충격이나 글에서 전해져 오는 감정으로 부단히 흔들렸던 경험, 혹은 미처 언어화하지 못했던 저의 경험들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 혹은 슬픔, 보다 복잡한 감정들을 떠올렸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아 부끄러운 글이지만 이 글이 여러분에게도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것이 제가 할 수 있는 가족 구조와 가족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아주 작지만큰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느 가족에 대한 에세이가 그렇듯, 가족의 이면을 들추면 마주치는 현실이 그렇듯, 이 에세이는 전혀 유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 나타난 슬픔과 외로움, 분노는 결코 제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족 구조를 들여다보면 어느 가족에서나 일어났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보편적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가족에 대한 환상이나 가족 이데올로기를 넘어 가족의 이면이나 새로운 친밀한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2013. 4. 3.
백목련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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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선택할 권리1)

백목련
서강대 여성학협동과정 석사과정
(w.magnolia99@gmail.com)


1) 이 제목은 파이어스톤이 그의 저서 『성의 변증법』 중 ‘결론’ 부분에서 언급한 ‘아이들에게 자신의 가족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한 것에서 따왔다. S. 파이어스톤, 김민예숙 역, 『성의변증법』, 풀빛, 1983.(S. Firestone, The Dialectic of Sex , Willian Morrow and Company, Inc., 1970.)



1

   "난 미국 사람이야."

   라며 사촌동생 A가 한국 음식 먹기를 거부했을 때 문득 나를 스쳐간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몇 년 전 고모부가 미국의 한 대학으로 박사 과정을 진학하게 되자 고모네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A가 세 살이던 해에 떠나서 올해, 그 친구가 여덟 살이 되는 해에 되돌아 왔으니 자신을 미국 사람이라 생각할 법도  했다. 따져보면 밥을 먹지 않는 것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 불과했다. 한 번은 핫도그를 먹으면서,

   "이거 뭐야? 왜 붙어 있는 거야?"

   "뭐? 깨? 이거 먹으면 건강해지라고 그랬겠지."

   "한국 사람들 이상해."

   깨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한국이 이상하다는 것, 그제서야 미국을 떠나온 것이 문제였다고 짐작하게 되었다. 고모와 고모부에게는 한국이 돌아가야 할 그리운 곳이고 아직 엄마 옆에서 떨어진 기억이 없는 4살짜리 동생에게는 미국이든 한국이든 엄마 옆에만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었겠지만 A는 많은 것을 미국에 두고 와야 했다. 누구와 만나는지, 어디에, 어떤 환경에 사는지, 어떤 말을 쓰는지, 무엇을 먹는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잘 때까지 계속 낯선 것들과 부대껴야 하는 상황. '하루아침에 바뀐 일상'이라는 것의 의미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단순하게 바뀐 환경에 적응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2

   아무도 없는 집 안, 창문 앞에 서서 커튼을 부여잡고 멍하니 보낸 시간. 꽤 오랜 시간 동안 내가 떠올린 어떤 사람들. 누군지 얼굴도 전혀 기억나지 않고 어깨 아래로의 몸만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희미한 기억.



3

   아빠, 아빠의 여자친구와 살다가 갑자기 부산에 있는 친가로 내려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

   "혜영아!"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 몸이 일어나지더니,

   "이모?"

   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내 이모인가? 내가 이모라고 부른 아줌마를 따라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갔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반겼고 좋아해 주었지만 너무 낯설었다. 어떤 곳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장소와 사람들. 몇 번을 다녀와서야 내가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편하다는 것을 알았다. 낯설지만 익숙한 그 집의 냄새, 그 집에서 먹는 밥, 그 집의 분위기, 그 집의 사람들.



4

   아직도 그날 밤을 잊을 수 없다. 할머니는 목욕탕에 가고 할아버지는 잠깐 자리를 비웠던 여섯 살의 어느 날 밤. 연락도 없이 찾아온 아빠는 자기를 따라가자고 했다. 불안했던 나는 할머니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며 싫다고 둘러댔지만 아빠는 계속 졸랐다. 이길 수 없었다. 곰인형 하나만을 안고 따라 나섰다. 그때까지도 아빠를 따라나서는 것이 내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전혀 알지 못했다. 차 뒷자석에 앉아 졸다 깨기를 수차례 반복하고서야 도착한 어느 깜깜한 건물로 들어갔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여자친구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아빠와 아빠의 여자친구가 일하러 나간 동안 여섯 살짜리가 갈 수 있는 유치원은 많지 않았고 들어갔다 해도 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켜 쫓겨나기 일쑤였다. 대부분의 시간은 집에서 보내다 차츰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동네에 나와서 아이들을 기다렸고 제일 늦게 집으로 들어갔다. 나를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잠들 때가 되어서야 아빠나 아빠의 여자친구가 집에 들어왔었다.

   티비도 없었고 전화나 편지를 쓸 줄 몰랐던 그때의 나는 창문 앞에 서서 멍하니 있는 것을 좋아했다.



5

   학교에 가고 전화를 쓰는 방법을 알게 되자 친가에 연락할 수 있었다. 친할머니는 혹시나 내가 아빠의 여자친구한테 구박 받을까봐 책이나 옷, 편지와 함께 배를 갈라 동전을 잔뜩 넣은 강아지 인형을 몰래 넣어서 보내주었고 나는 그 돈을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심심할 때는 집 앞 공중전화에 가서 아빠 직장에 전화하기도 했고 친가에 전화해 간간히 내가 필요한 것들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나 아빠는 물론이고 누구에게도 외가에 대해서 물을 수 없었다. 왠지 물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전화번호는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을 더듬어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삐뚤빼뚤한 어린아이 글씨로,

받는 사람
부산에 있는 우리집인데요, 사하역 근처에 큰길에서 조금만 들어오면 미용실하고 피아노학원 사이에 있는 골목에 계단이 엄청 많거든요? 쭉 올라가면 집이 네 개가 있는데 오른쪽 두 번째 주황색 대문집에 꼭 주세요.

   '할머니, 할아버지, 나 여기 잘 있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만 그것이었다. 내가 여기 있다, 정말 별거 아닌 말이었다. 나를 데려 오라는 말도 아니었다. 왜냐면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엉터리 주소를 적은 편지가 외가로 갈 리가 없었고 고민 끝에 나는 그 구구절절한 주소와 함께 우리집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편지는 되돌아왔고 다시는 외가에 편지를 보내려 애쓰지 않았다. 그 때,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외가 가족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을 접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그 사람들이 누군지 기억하지 않게 됐는지도 모른다.



6

   초등학교 2학년 봄방학 때 깜짝 선물처럼 혼자서 친가에 갔다 오려고 했었다. 나는 서울과 부산이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친구들도 어디 놀러 가고 없는 봄방학 일주일을 혼자 보내기 싫었다. 무엇보다 내가 갑자기 친가에 나타나면 다들 엄청 똑똑하다고 칭찬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에 큰 도로를 다닐 때 어느 버스가 터미널로 가는지 유심히 잘 봐뒀다. 세뱃돈은 충분히 남아 있었고 봄방학 첫 날 나는 곰인형과 속옷 몇 장을 챙겨 좌석버스를 탔다. 정류장에는 잘 내렸지만 길 건너편 버스  터미널로 가는 지하도가 너무 복잡해 결국 그 근처를 서성였다. 어린 아이가 혼자 있는 것을 이상하게 본 아줌마가 나를 경찰서로 보냈다.

   그날 밤, 아빠와 그 여자친구는 크게 싸웠고 며칠 후 친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때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나에게 네가 어디로 옮겨갈 것인지,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 거기가 왜 외가가 아닌지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았다. 다만 부산에 내려간 이후로 내가 혼자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7

   엄마가 죽기 전에도 나는 주로 외가에서 지냈다. 직장 생활에 바빴던 엄마, 아빠를 대신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늘 내 옆에 있었다. 엄마가 죽고 나서도 나는 외가에 있었다. 아빠는 따로 지내고 한 번씩 들렀던 것 같다. 이모들은 내가 어릴 때 할머니가 안 보이면 여기저기를 다니며 할머니를 찾았다고 했다. 내 일상의 대부분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이 었고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8

   지난한 세월을 보내고서야 그때 창문 앞에서 애써 기억해보려 했던 얼굴 없는 사람들이 바로 할머니, 할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내가 이모나 다른 외가 가족들을 다시 만났을 때 기억하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는지, 내 안에 잔잔히 흐르는 외롭고 슬픈 감정들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어린 나에게 누가 가족이었는지의 것들을 우습게도 이제야 그 조각들을 맞춰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네 살 때 엄마를 잃었고 여섯 살 때는 가족과 헤어져야 했다. 그리고 다시 아홉 살때 또 전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내 삶을 시작해야 했다. 죽고 사는 것이 사람의 손을 떠나 있는 문제라면 가족을 선택할 권리, 그러니까 어디에서, 누구와 살지에 대한 결정권은 적어도, 내게, 주어졌어야 했다. 누구도 내게 누구와 살 것이냐 거나 어디서 살 것인지에 대해서 ‘당연히’ 묻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나의 ‘가족’이었고 그것은 내 삶을 이리 저리 바꿀 수 있는 결정권을 가진 ‘어른’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들을 감당하느라 너무 오랜 시간을 외롭게 보내야 했다.



2012년 6월 22일 금요일

미국미술의 다양한 정체성에 대하여

이것이 미국미술이다: 휘트니 미술관 展
2011.6.11-2011.9.25
덕수궁 미술관



   전시의 구성: 오히려 샘솟는 미국미술에 대한 갈증




   '이것이 미국미술이다'라는 굉장히 도전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는 전시명과는 달리, 미술관을 찬찬히 돌아본 후에 든 생각은 '전시를 보다만 느낌'이었다. 전시명을 통해 유추해 봤을 때, 일반인에게 미술은 주로 유럽 중심이기 때문에 미국미술이 생소할 것이고 또 미술사적으로도 20세기 중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른 미국이라는 점에서 미국미술의 정체성, 지향 등 여러 측면을 한 번에 강렬하게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4부로 구성된 단 87점의 작품으로는 미국미술에 대한 목마름을 잠깐 해소하게 해줄 뿐 '아, 이것이야 말로 미국미술이구나!'하는 느낌표를 주지는 못했다.

   전시에서 추상표현주의를 비판하고 일상용품을 통해 추상성보다 객관성을 중시했던 신다다이즘 작품을 전시하는 데는 적어도 한 두 점의 추상표현주의 작품이 있어야 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추상표현주의는 미국으로 미술 중심지 이전을 알린 첫 신호탄이라는 점에서도 그 중요성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관람할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후에 지적할 다양한 정체성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추상표현주의 여성 작가인 리 크레이즈너나 일레인 드 쿠닝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도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다양한 인종과 계급, 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으로서 미국과 이 지역의 미술가들을 생각해 봤을 때 전시에서 이러한 점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다. 여성인 마리솔 에스코바나 멕시코계 이주민인 엔리케 차고야, 복싱 글러브를 통해 흑인 정체성을 표현한 게리 시몬스 등의 작품이 있지만 극단적으로 말하면 WASP 미술 사이에 이들을 끼워 넣기 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워낙 적은 수의 작품을 전시했던 터라 이를 주로 전시할 수는 없었겠지만 1부인 '아메리칸 아이콘과 소비문화'에서 주로 백인 중심의 정체성을 일면 드러냈기 때문에 2부인 '오브제와 정체성'에서는 소제목에 맞게 미국 내 다양한 소수자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미국미술의 대표라고 손꼽히는 팝아트 작품을 실제로 볼 수 있었던 점은 좋았다. 특히 미술이라는 위대함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체제 속에서 소품종 대량생산 체제 아래 미국인이 주로 사용하던 표백제의 박스나 제품 로고만으로도 미국인의 정체성과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무엇을 소비하는 가에 따라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또한 모성이나 신성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거나 인상주의 같은 기법 상의 혁신이 아닌 사적이나 지극히 대중적인 영역을 모티브로,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아름답지 않은 소재들을 가지고도 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이를 통해 담론 중심으로 공적 영역에 한정됐던 미술이 사적 영역과의 경계가 흐릿해 지는 분기점인 팝아트를 거치면서 '내 주변의, 우리 주변의 일상이야 말로 아름답지 않은가? 오히려 이 흔해빠진 물건들이야 말로 내 삶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름답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해 볼 수 있게 했다.




<여인과 강아지>, 마리솔 에스코바, 1964



마리솔 에스코바, <여인과 강아지> 
나무, 석고, 합성 폴리머 박제한 강아지 머리 182.9×215.9×121.9cm 1964


   '여성'은 미술의 주 소재 중 하나였지만 여성이 직접 여성을 그려낸(이 작품에서는 '만들어낸'이라고 해야겠지만) 작품이 적다는 점에서 가장 먼저 <여인과 강아지>를 보고 싶었다. 이 작품에서는 여성의 아름다움으로 그려지는 흰 피부와 발그레한 볼, 풍만한 가슴, 탄력 있는 허벅지 등이 강조되지 않았다. 오히려 두 번째에 서 있는 여성을 통해 여성을 상징하는 기호인 가슴과 엉덩이를 과장해서 보는 사람에게 불편함을 줬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몸 그 자체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백인, 젊음, 단련되지 않음(연약함) 등의 다양한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 툭 튀어나온 가슴과 엉덩이로는 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첫 번째와 세 번째 여인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여성이 감정이 풍부하기 때문에 여러 표정을 보여준다?'거나 '팔색조처럼 다양한 모습을 지닌 여성이다?' 등 여러 질문을 할 수 있지만 나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여인을 보면서 어쩌면 여성의 정체성은 분열되어 있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누구로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속에 여성 그 자신은 없다. 예를 들어 만약 누군가의 어머니가 자신의 삶을 찾겠다며 가사와 육아를 '소홀히' 하기로 결정한다면 그는 곧 이기적인 여자로 낙인 찍힐 것이다. 또한 이성애적 관계에서 남성은 아름답거나 지적이거나 섬세하거나 '여성적'인 여성을 이상형으로 삼지만 여성은 자신이 되고 싶은 이미지의 남성을 이상형으로 삼는다. 여성은 일생을 통해 자신의 자아 찾기를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 하지만 여성 개인의 정체성과 관계적 정체성이 충돌하는 와중에 어떤 것이 자신의 정체성인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 볼 일이다. 결국 이 작품에서 다양한 얼굴을 가진 여성이 의미하는 바는 여성 내부에서 보이는 정체성의 대결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또한 모두 치마를 입은 여성이라지만 맨 오른쪽의 아이는 여성 중에서도 흑인이며 아이라는 점에서 가장 소수자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세 번째 여인이 자신의 어깨에 얹은 손에 대해 혹은 자신의 상황에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서는 모든 여성이 여성이라는 동일한 집단 내에서 인종, 연령, 계급 등 차이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모두들 한껏 차려입은 채 거리에 나섰지만 왠지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 중산층 가정의 상징인 애완견까지 끌고 나와 산책을 즐기지만 흑인 여자아이의 불쾌감 외에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다. 20세기 중반 이후 유례 없었던 물질적 풍요가 이 작품에서 드러난 것처럼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이나 감정을 빈곤하게 만들지 않았는지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소득이나 생활수준은 평균 혹은 그 이상이지만 행복하기 위해서 갖춘 조건들은 오히려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가지면 가질수록, 누리면 누릴수록 공허한 현대인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에스코바의 <여인과 강아지>에서 여성이 위치한 조건, 여성의 아름다움과 그에 대한 비판, 정체성, 여성 내 차이 등 다양한 맥락을 짚어낼 수 있었다. 미술사 내에서 여성이 주로 보여지는 존재로 자리매김해 왔던 것을 고려할 때 여성이라는 소재를 작품화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예술 활동이 되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을 그린 더 많은 작품을 또 다른 전시에서 볼 수 있도록 소원해 본다.



2012년 6월 19일 화요일

영화 <아바타>의 영웅 서사 구조 속 소수자1) 재현 방식2)


서강대학교 여성학협동과정 백목련
 
 

1. 서론
 

   영화 <아바타>(2009)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작품으로 미래 지구 자원의 고갈을 해결하기 위해 행성 판도라에서 일어나는 인류와 나비족의 대립을 공상과학과 서부극 장르를 차용하여 그려냈다. 뛰어난 컴퓨터 그래픽과 3차원 입체기술로 개봉 이전부터 큰 관심을 끌었으며 국내에서만 1,318만 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흥행했다. 이 글에서는 <아바타>가 보여준 집약적인 과학기술의 매력뿐만 아니라 그 서사 구조 역시 관객을 몰입시키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보고3) 영웅 서사에서 서부극을 차용, 변주한 이항 대립 구조와 남성 영웅과 여성 조력자가 등장하는 의미에 대해 분석해 내고자 한다.

   먼저 <아바타>에서 서부극의 요소를 짚어보고 이 장르를 기반으로 이항 대립 구조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볼 것이다. 인류와의 대립 구조 속에서 대안적이며 생태중심적인 가치를 지닌 공간인 판도라와 이를 내면화한 나비족이 제3세계, 식민지, 혹은 원시부족의 재현이라는 것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설정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대안적이며 생태중심적 가치를 제안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식민지 이미지’를 그대로 끌어옴으로써 오히려 관객에게 거리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하고 ‘문명’과 ‘미개’라는 조작적이며 대립적인 이미지를 고착화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다음으로 일반적인 영웅 서사에서 여성이 영웅적 여정의 목표이자 보상으로서 제시되는 것과 달리 두 명의 뛰어난 여성인 그레이스 박사와 네이티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아바타>는 다른 영웅 서사와 차별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여성들은 남성 주인공이 영웅으로 변모하는 순간 영웅적 여정을 돕는 조력자의 역할로 전환되는 것에 그치고 있으며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볼 것이다.
 
1) 이 글에서 언급하는 ‘소수자’는 선주민(先住民; 일반적으로 ‘원주민(原住民)’으로 언급하나 이 단어가 가진 오리엔탈리즘적 의미를 탈피하고자 선주민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과 여성이다.
2) 2012년 1학기 연세대학교 문화학협동과정 문화연구입문 기말과제로 제출한 페이퍼이며 선생님과 수강생들의 조언을 받아 수정, 보완하였다.
3) <아바타> 못지않은 과학기술을 사용한 영화 <트론>(2010)은 흥행에 참패했으며 <아바타> 개봉 이후 다양한 패러디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서사 구조 등이 관객과 어떤 작용을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 서부극을 차용, 변주한 이항 대립 구조
 

   다수의 관객들은 <아바타>가 공상과학 영화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린다. 하지만 이 영화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서부극 장르를 차용, 변주한 영화 <늑대와 함께 춤을>(1990)과 같은 구조를 지닌다. 첫째, 선과 악,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대립이 드러난다, 둘째, 선주민이 고유한 언어를 가졌다, 셋째, 자연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넷째, 주인공과 선주민이 사랑에 빠진다, 다섯째, 주인공이 선주민과 대자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서성식, 100-113)

   그래서 <아바타>에서는 인류를 악, 식민자, 이익집단, 과학기술문명 등의 서양 기독교 이미지로, 나비족을 선, 피식민자, 공동체, 원시문명 등의 동양(제3세계) 토착신앙 이미지로 대비시킨다.(김희경, 477) 이항 대립 구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류를 다시 군대-기업 집단 대 과학자 집단의 대립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대립 구조 내 다시 대립 구조를 만들어냄으로써 1차적인 선악 구도에 익숙해져 있는 관객들이 특정 문제 상황 내 현실과 비슷하며 복잡한 맥락을 지닌 관계를 인지하게 되며 영화에 한 층 더 빠져들게 했던 것이다.
 

   1) 인류4) 대 나비족
 
   인류는 미래 지구의 자원고갈을 해결하고자 행성 판도라에 정착해 있다. 이들은 우주선 내에서 생활하며 그 안은 과학기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각종 장비와 시설, 무기를 갖추고 있으며 제약된 공간이지만 매우 효율적인 공간 사용을 보여준다. 인류가 우주선에서 생활하는 장면은 주로 근거리에서 촬영되며 이는 우주선 내부이기 때문에 시설이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세련된 과학 기술의 사용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류는 제복을 입은 군인으로 등장하며 신속한 명령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들은 언옵타늄5)을 채굴하는 것이 주 목적이며 이를 위해 판도라나 나비족에 대한 파괴와 공격을 서슴지 않으며 이성적, 합리적 집단으로 비추어진다. 이들은 다시 군대-기업 집단과 과학자 집단으로 양분된다.
   반면에 나비족은 판도라의 선주민이며 홈트리(Home Tree)에서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나비족의 세계인 판도라는 원시림 혹은 밀림을 연상케 하며 인류를 위협하는 기이한 형상의 동물들이 살고 있다. 여기서는 전체를 조망하는 장면이 많은데 주로 넓게 펼쳐진 자연 경관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며 나비족 역시 넓은 공간에서 이를 용도에 따라 분리하지 않고 성기게 사용하여 집단적으로 흩어져 지내기 때문이다. 또한 원시부족의 복식을 그대로 차용함으로서 제3세계 식민지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들은 자연 즉, 대모신인 아이와와의 교감을 중요시하며 생명체를 이용하지만 전유하지 않는다.
 
4) 군인, 기업가, 과학자의 선별된 집단이지만 편의상 ‘인류’라고 칭한다.
5) 판도라에 매장된 지하광물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수적인 자원이다.


   2) 군대-기업 집단 대 과학자 집단
 
   또 다른 대립의 축은 군대-기업 집단 대 과학자 집단으로 앞선 대립 구도에서 인류가 군대-기업과 일치한다. 효율적인 언옵타늄의 채취를 최우선 과제로 여기며 우주선 내 자원 조달과 명령 체계의 상위에 있다. 판도라와 나비족을 대상화하지 않고 고유의 생활체계를 존중하려는 과학자 집단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주로 기지의 보안담당관인 퀴리치와 행정관 셀프리지로 대표된다.

   반면에 과학자 집단은 기존에 재현되던 과학자의 이미지와 달리 판도라 행성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레이스 박사를 중심으로 판도라의 네트워크와 체제에 대해 큰 호기심과 열정을 보이며 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지만 쉽게 자원화, 대상화하려는 군대-기업 집단과 계속해서 갈등을 겪는다.

 
   영화에서는 주로 첫 번째 대립 구조인 인류와 나비족을 중심으로 서사 구조가 전개된다. 이들의 대립이 심화될수록 두 번째 대립 구조에서 과학자 집단은 나비족으로 흡수되어 하나의 대립 구조로 변화한다. 이러한 대립 구조 내에서 관객들은 자신과 동질적인 인류보다는 거주지를 침략당한 나비족에 공감하며 과학자 집단을 지지하는 양상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나비족이 보여주는 대안적이며 생태친화적인 가치에 우선순위를 두며 이를 보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는 퀴리치나 셀프리지가 나비족을 ‘파란 원숭이들’이라 부르며 ‘야만족’으로 보고 자원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는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 사고(서성식, 104-108)에서가 아니라 인류가 나비족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상황에서 깨지게 된다.

   인류는 전투기를 타고 공중에서 엄청난 수와 종류의 무기를 가지고 나비족을 공격하는 반면에 나비족은 활과 화살이라는 단순한 무기를 가지고 지상에서 대항한다. 여기서 인류를 보여줄 때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구도를 채택한 것은 나비족의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구도보다 훨씬 위압감을 느끼게 하며 이들이 전투에서 주도권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효과를 갖게 한다. 또한 선악 대립 구도에서 자신이 몰입하는 집단이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무력하게 공격 당하는 서사 구조에 익숙하지 않으며, 승자로서의 지배적 쾌락을 선호하는 관객들은 전투 장면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살며시 인류로 전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나비족은 효과적인 대응 방법을 고안하기 보다는 오히려 대답이 없는 대모신 아이와에게 간청하거나 그레이스 박사를 살리기 위한 일련의 의식을 벌이는데 이 역시 제3세계 식민지를 연상케 함으로써 관객은 다시 한 번 나비족과의 거리감을 형성한다.

   이는 <아바타>가 선주민을 열등하고 미개한 집단으로 상정해 자원을 착취하려는 식민지 지배자의 시선을 명백히 그러나 은밀하게 드러냄으로써 생태중심적인 판도라 세계의 매커니즘과 나비족의 생활상에 공감하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양 즉, 식민자의 입장에서 피식민자를 이상화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보았던 관점을 그대로 차용했다. 그래서 초기에는 나비족에 몰입하게 되지만 극이 전개되면서 점차 관객은 자신이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복합적인 시각적 요소를 통해 확인한다. 물론 영화 전반에서 관객과 나비족은 같은 존재일 수 없지만 시공간과 입장이 다른 것-이것은 다양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과 행동 양식의 근본적 차이-이것은 거리감을 만들어 낸다-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특히 나비족이 의식을 치루는 과정은 원시부족의 전형을 보여주며 이들이 ‘미개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

   그러나 <아바타>는 이에 그치지 않고 관객을 다시 영화 서사 구조로 끌어들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재전투 장면에서는 행성에 산재한 50개의 부족을 연합한 대항군을 조직하고 지형을 이용하는 등 전략을 펼치며 인류에 대항하며 자신의 영역을 지켜내기 때문이다. 또한 대답하지 않던 대모신 아이와 역시 동물들을 동원하는 초자연적인 힘을 보여줌으로서 ‘선’이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준다. 다만 많은 살상을 벌임으로써 생태중심적인 가치를 지녔던 나비족의 본래 사상과는 달리하는 모순이 있지만 ‘악’으로 상정된 군대-기업 집단을 무찌르는 쾌감을 줌으로서 관객들이 다시 서사 구조의 흐름을 따라가게 만든다. 그리고 앞선 전투와 달리 재전투에서는 인류와 나비족을 공중과 지상의 구도가 아니라 공중 대 공중, 지상 대 지상의 동일한 공간에서 대결하게 만듦으로서 둘의 위치나 힘이 동일해졌다는 인상을 준다.

   결국 <아바타>는 근본적으로 나비족을 원시부족과 동일하게 묘사함으로써 ‘문화’적인 인류와 대비되는 ‘미개’ 이미지를 불러오며 이들의 권력 관계를 역전하는 방식으로 인류가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살상과 파괴라는 요소를 가지고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오리엔탈리즘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였으며 결과적으로는 영화 전반에서 지지하는 대안적이며 생태중심적인 가치와는 한층 멀어지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이를 전면에 배치하여 관객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교묘히 오리엔탈리즘을 전시함으로써 흡인력 있는 영화로 보이게 한다.
 
 

3. 남성 영웅과 여성 조력자
 

   영웅적 여정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캠벨, 45) <아바타> 역시 영웅 신화를 기본으로 극을 전개하고 있으나 특이한 점은 두 명의 여성 조력자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영웅 신화에서 여성을 영웅적 여정의 보상이나 목표로 삼는 것과 다르며 두 여성이 모두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고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젠더 역할의 재현을 균열시킨다. 그러나 남성 주인공이 비범한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각자의 유형에 따라 조력자로 그 역할이 전환된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다.
 

   1) 남성 영웅: 제이크
 

   주인공이자 남성 영웅으로 등장하는 제이크는 은퇴한 해병이자 장애인으로 과학자였던 죽은 형 토미 대신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는 아바타 프로그램을 통해 전신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조력자들의 지도를 통해 판도라 세계에 빠르게 적응한다. 또한 대모신인 아이와6)에게 계시를 받은 자이다. 즉, 제이크는 현실(우주선 내 인간)에서는 소외되지만 가상(아바타인 나비족)에서 비범한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또한 제이크는 군대-기업 집단과 과학자 집단, 인류와 나비족 대립의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매개자가 아니라 초기에 군대-기업 집단과 인류의 입장에서 과학자 집단의 지원을 받다가 차츰 나비족에 동화되어 입장을 옮겨가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레이스 박사와 네이티리를 비롯한 여러 조력자들의 도움을 통해 영웅적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게 된다. 위기 상황에서 전설적 상징인 토르쿠 막토를 자신이 먼저 나서 선택하여 50개의 부족을 연합해 대항군을 소집하는 비범한 능력을 보인다. 영웅적 여정의 마지막에는 대모신 아이와의 힘을 통해 나비족으로 존재를 옮겨가면서 눈을 뜨는 장면으로 영화가 마무리되는데 여기서 제이크는 새로운 가치를 담지한 인물로 재탄생한다.(서성식, 111-113)
 
6) 영웅 신화에서 세계는 어머니 우주로 대변되기 때문에 신이 ‘어머니’라는 여성형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캠벨, 374)


   2) 여성 조력자1(실패한 조력자): 그레이스 박사


   그레이스 박사는 판도라를 연구하는 식물학자로서 이 세계에 대해서 과학자적인 입장뿐만 아니라 인류학자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기존 과학자 재현과 달리 자연을 무조건 이용, 착취하지 않으며 판도라 세계의 매커니즘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기업 집단과 대립하게 되며 제이크가 계시를 받아 영웅으로 성장하기 전까지 인류 중 가장 판도라 세계과 나비족에 정통한 인물이다.

   제이크와 동일하게 판도라의 외부인이지만 영웅으로 선택받지 못했으며 인간이 가진 신체적 상황의 한계(심각한 부상) 때문에 나비족으로의 존재적 전환을 맞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영웅적 여정에 실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초기에 제이크를 지휘하고 교육하는 관리자로서 등장하지만 그가 나비족과 접촉하고 계시를 받는 순간 조력자로 전환된다.
 

   3) 여성 조력자2(내조형 조력자): 네이티리
 
   네이티리는 나비족 족장 에이투칸과 정신적 지주 모아의 딸로서 차기 족장 츠테이와 혼인하여 함께 나비족을 이끌어갈 예정이었다. 또한 뛰어난 전사로서 묘사되며 영화 속에서 주로 여성 나비족의 대표로 등장한다.

   초기에 외부세력인 제이크에게 굉장히 공격적, 적대적이지만 계시 받은 자를 교육하라는 족장의 지시로 제이크의 나비족으로서의 정착을 돕는다. 여기서 네이티리는 판도라 세계 내 존재이자 나비족의 지배 계급으로 판도라 세계와 함게 살아가며 제이크에게 적절한 조언과 지도를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제이크와 사랑에 빠짐 즉, 그의 ‘선택’을 받음으로써 조력자 역할로 전환된다. 제이크를 교육하던 스승에서 지시를 따르는 연인으로, 각자 에이칸(날짐승)을 타다가 투르크 막토를 탄 제이크 뒤에 앉아 사기를 돋우는 역할을 하는 등의 장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제이크와 두 조력자는 초기에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다. 제이크와 그레이스 박사는 프로그램 참가자와 연구자이자 관리자의 관계로 만나며 현실 세계에서 제이크가 과학자가 아닌 전직 해병이었다는 것과 그 태도 때문에 갈등을 겪는다. 그러나 제이크가 아바타를 다루는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 박사의 인정과 지지를 받게 된다. 이윽고 제이크가 아이와의 계시를 받고 나비족에 합류하게 되자 박사는 홈트리 근처 기지로 가는 인물로 제이크를 선택한다. 이 과정에서 제이크는 박사의 지시를 받는 존재에서 아바타 프로그램의 핵심적 인물로 박사의 보조를 받는 자로 전환되며 박사 역시 관리자에서 보조자로 역할이 바뀐다. 또한 오랜 기간 동안 판도라에 머물며 외부인으로서는 누구보다 깊이 판도라 세계의 매커니즘을 이해하고 교류를 추진한 인물은 박사이지만 오히려 대모신인 아이와의 선택을 받은 자는 제이크로서 ‘실패’한 조력자이다. 이는 그가 나비족으로의 존재적 전환을 이루지 못하고 인간이라는 한계에 봉착한다는 상황에서도 한 번 더 이러한 암시를 확인할 수 있다.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경우, 네이티리는 외부인인 제이크를 경계한다. 그러나 제이크를 교육하면서 친밀감을 형성하고 바르게 나비족의 생활을 습득해 가는 그를 뿌듯하게 지켜본다. 네이티리는 내부인이자 나비족 내 상류 계급이며 영화 전반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나비족 여성에 비해 독보적 위치를 점하는 뛰어난 전사로 묘사된다. 그러나 서사 구조가 전개되고 제이크가 나비족으로 인정을 받자 수동적인 모습으로 그의 선택을 기다린다. “너는 이제 네가 원하는 여성 역시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며 다른 나비족 여성을 추천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선택 받기를 바란다. 초기의 네이티리가 제이크에게 먼저 지시하며 제안하는 관계였던 것과 다른 모습이다. 네이티리는 박사와 마찬가지로 기존 젠더 재현과 다르게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인물로 묘사되었으나 남성 영웅과의 이성애적 관계에 진입하자 선택을 기다리며 순응하는 인물로 바뀐다. 이는 약혼자 츠테이와의 관계와 비교하면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결국 <아바타>에서 네이티리는 독립적인 상황에서는 뛰어난 ‘개인’이지만 남성 영웅의 선택을 받으면 이에 순응하며 내조하는 ‘여성’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남성 영웅인 제이크는 현실에서 장애인으로 남성성을 잃은 소수자의 위치에 있다. 그러나 아바타 프로그램을 통해 가상이자 새로운 세계에서 상실한 남성성을 회복한다. 이 과정에서 제이크가 이상적 남성상인 (퇴역한) 해병이었다는 것도 영향을 미치는데 전직 군인이었기 때문에 운동신경이 뛰어나며 변화된 상황에 적응이 빠른 상황이 쉽게 설명된다. 또한 인간 제이크는 자신의 장애를 매 일상에서 직면하지만 나비족으로서는 엄청난 운동성과 속도감을 보여줌으로서7) 남성 영웅으로의 전환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설정은 여성과 달리 소수자가 된 남성에게 다시 남성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줌으로써 가부장제 사회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 남성들에게 감동을 주게 된다.

   이렇게 <아바타>에서 뛰어난 여성 조력자가 판도라 세계 내부인과 외부인으로 각각 등장한다는 것은 영웅 신화에서 여성의 존재성이 바뀌고 기존 젠더 재현 체계에 진동을 일으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사회에서 원하는 여성상과 실제 여성의 모습 역시 바뀌었으며 영화에서 이를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 영웅과의 만남에서 영웅적 여정에 동참하는 것에 실패하거나 내조하는 역할로 바뀌는 등 조력자로 전환되는 것은 다시금 가부장제 사회 내에서 원하는 여성상의 내용과 실제 여성이 마주하는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남성 영웅과 이성애적 관계가 아닌 사제 관계였던 그레이스 박사는 ‘남성’도 ‘영웅’도 아니며 더구나 인간이라는 한계 때문에 더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혹은 그 발휘가 인정, 용납되는) 영역을 찾지 못하여 죽음으로서 서사 구조에서 사라진다. 한편 네이티리는 대안적 가치를 지닌 세계의 내부자이며 남성 영웅과 이성애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로서 남성 영웅의 정착을 돕고 그의 선택을 받은 이후에는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역할에서 수동적이며 보조하는 내조자로 남게 된다.

  즉, <아바타>에서는 남성성을 상실한 남성이 영웅적 여정을 통해 이를 재획득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역할과 능력을 보여주며 구체적이고 살아있고 경험되는 역사적 주체로 재현되고, 조력자 여성과의 관계에서 그의 역사성을 보여준다. 반면에 조력자 여성은 뛰어난 능력과 역량을 가진 존재이지만 변화된 남성 영웅(과 그 역할)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성의 실천 양식이 달라지지만 동일한 (이성애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으로 재현됨으로써 탈역사성을 드러낸다.(김은실, 77; 재구성) 그러나 여기서 동일한 ‘여성’으로 일치시킬 수 없는 ‘개인’의 경우는 죽음으로써 그 맥락을 유지하게 된다.
 
7) 의솔의 조언


 
< 참고문헌 >
 
구미정(2011), “<아바타>에 나타난 생태적 가치”, 현상과 인식, 2011년 봄/여름호
김은실(2001), 『여성의 몸, 몸의 문화정치학』, 또 하나의 문화, pp. 43-81
김희정(2010), “영화 <아바타>의 이항 대립 구조”,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27집
에드워드 사이드(1995),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역, 교보문고, pp. 11-58
서성식(2010),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진화 관점에서 본 영화 아바타, STEM Journal, 11(2)권
조셉 캠벨(2007),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이윤기 역, 민음사
조지 L. 모스(2004), 『남자의 이미지』, 이광조 역, 문예출판사
Stuart Hall(Edt.)(1997), 『Representation: Cultural Representation and Signifying Practices』, Sage, pp. 15-19, 257-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