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22일 금요일

미국미술의 다양한 정체성에 대하여

이것이 미국미술이다: 휘트니 미술관 展
2011.6.11-2011.9.25
덕수궁 미술관



   전시의 구성: 오히려 샘솟는 미국미술에 대한 갈증




   '이것이 미국미술이다'라는 굉장히 도전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는 전시명과는 달리, 미술관을 찬찬히 돌아본 후에 든 생각은 '전시를 보다만 느낌'이었다. 전시명을 통해 유추해 봤을 때, 일반인에게 미술은 주로 유럽 중심이기 때문에 미국미술이 생소할 것이고 또 미술사적으로도 20세기 중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른 미국이라는 점에서 미국미술의 정체성, 지향 등 여러 측면을 한 번에 강렬하게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4부로 구성된 단 87점의 작품으로는 미국미술에 대한 목마름을 잠깐 해소하게 해줄 뿐 '아, 이것이야 말로 미국미술이구나!'하는 느낌표를 주지는 못했다.

   전시에서 추상표현주의를 비판하고 일상용품을 통해 추상성보다 객관성을 중시했던 신다다이즘 작품을 전시하는 데는 적어도 한 두 점의 추상표현주의 작품이 있어야 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추상표현주의는 미국으로 미술 중심지 이전을 알린 첫 신호탄이라는 점에서도 그 중요성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관람할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후에 지적할 다양한 정체성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추상표현주의 여성 작가인 리 크레이즈너나 일레인 드 쿠닝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도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다양한 인종과 계급, 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으로서 미국과 이 지역의 미술가들을 생각해 봤을 때 전시에서 이러한 점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다. 여성인 마리솔 에스코바나 멕시코계 이주민인 엔리케 차고야, 복싱 글러브를 통해 흑인 정체성을 표현한 게리 시몬스 등의 작품이 있지만 극단적으로 말하면 WASP 미술 사이에 이들을 끼워 넣기 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워낙 적은 수의 작품을 전시했던 터라 이를 주로 전시할 수는 없었겠지만 1부인 '아메리칸 아이콘과 소비문화'에서 주로 백인 중심의 정체성을 일면 드러냈기 때문에 2부인 '오브제와 정체성'에서는 소제목에 맞게 미국 내 다양한 소수자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미국미술의 대표라고 손꼽히는 팝아트 작품을 실제로 볼 수 있었던 점은 좋았다. 특히 미술이라는 위대함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체제 속에서 소품종 대량생산 체제 아래 미국인이 주로 사용하던 표백제의 박스나 제품 로고만으로도 미국인의 정체성과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무엇을 소비하는 가에 따라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또한 모성이나 신성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거나 인상주의 같은 기법 상의 혁신이 아닌 사적이나 지극히 대중적인 영역을 모티브로,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아름답지 않은 소재들을 가지고도 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이를 통해 담론 중심으로 공적 영역에 한정됐던 미술이 사적 영역과의 경계가 흐릿해 지는 분기점인 팝아트를 거치면서 '내 주변의, 우리 주변의 일상이야 말로 아름답지 않은가? 오히려 이 흔해빠진 물건들이야 말로 내 삶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름답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해 볼 수 있게 했다.




<여인과 강아지>, 마리솔 에스코바, 1964



마리솔 에스코바, <여인과 강아지> 
나무, 석고, 합성 폴리머 박제한 강아지 머리 182.9×215.9×121.9cm 1964


   '여성'은 미술의 주 소재 중 하나였지만 여성이 직접 여성을 그려낸(이 작품에서는 '만들어낸'이라고 해야겠지만) 작품이 적다는 점에서 가장 먼저 <여인과 강아지>를 보고 싶었다. 이 작품에서는 여성의 아름다움으로 그려지는 흰 피부와 발그레한 볼, 풍만한 가슴, 탄력 있는 허벅지 등이 강조되지 않았다. 오히려 두 번째에 서 있는 여성을 통해 여성을 상징하는 기호인 가슴과 엉덩이를 과장해서 보는 사람에게 불편함을 줬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몸 그 자체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백인, 젊음, 단련되지 않음(연약함) 등의 다양한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 툭 튀어나온 가슴과 엉덩이로는 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첫 번째와 세 번째 여인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여성이 감정이 풍부하기 때문에 여러 표정을 보여준다?'거나 '팔색조처럼 다양한 모습을 지닌 여성이다?' 등 여러 질문을 할 수 있지만 나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여인을 보면서 어쩌면 여성의 정체성은 분열되어 있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누구로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속에 여성 그 자신은 없다. 예를 들어 만약 누군가의 어머니가 자신의 삶을 찾겠다며 가사와 육아를 '소홀히' 하기로 결정한다면 그는 곧 이기적인 여자로 낙인 찍힐 것이다. 또한 이성애적 관계에서 남성은 아름답거나 지적이거나 섬세하거나 '여성적'인 여성을 이상형으로 삼지만 여성은 자신이 되고 싶은 이미지의 남성을 이상형으로 삼는다. 여성은 일생을 통해 자신의 자아 찾기를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 하지만 여성 개인의 정체성과 관계적 정체성이 충돌하는 와중에 어떤 것이 자신의 정체성인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 볼 일이다. 결국 이 작품에서 다양한 얼굴을 가진 여성이 의미하는 바는 여성 내부에서 보이는 정체성의 대결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또한 모두 치마를 입은 여성이라지만 맨 오른쪽의 아이는 여성 중에서도 흑인이며 아이라는 점에서 가장 소수자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세 번째 여인이 자신의 어깨에 얹은 손에 대해 혹은 자신의 상황에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서는 모든 여성이 여성이라는 동일한 집단 내에서 인종, 연령, 계급 등 차이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모두들 한껏 차려입은 채 거리에 나섰지만 왠지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 중산층 가정의 상징인 애완견까지 끌고 나와 산책을 즐기지만 흑인 여자아이의 불쾌감 외에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다. 20세기 중반 이후 유례 없었던 물질적 풍요가 이 작품에서 드러난 것처럼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이나 감정을 빈곤하게 만들지 않았는지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소득이나 생활수준은 평균 혹은 그 이상이지만 행복하기 위해서 갖춘 조건들은 오히려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가지면 가질수록, 누리면 누릴수록 공허한 현대인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에스코바의 <여인과 강아지>에서 여성이 위치한 조건, 여성의 아름다움과 그에 대한 비판, 정체성, 여성 내 차이 등 다양한 맥락을 짚어낼 수 있었다. 미술사 내에서 여성이 주로 보여지는 존재로 자리매김해 왔던 것을 고려할 때 여성이라는 소재를 작품화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예술 활동이 되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을 그린 더 많은 작품을 또 다른 전시에서 볼 수 있도록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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