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글을 써서는 안 된다. 남을 위해서도 써야 한다. 머나먼 곳에 사는 알지 못하는 미래의 여자들을 위해서 말이다. 우리가 전혀 영웅이 아니었음을 알게 하자. 다만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열정적으로 믿고 추구했을 뿐이다. 우리는 때로 강했지만 때로는 매우 약했다.
-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이 에세이는 지혜 선생님의 젠더연구입문 수업 과제로 작성한 글입니다.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늘 자신을 성찰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려 노력하는 자세를 가르쳐 주신 지혜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 에세이를 읽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깊은 위로와 지지를 해 준 친구들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저는 가족에 대한 페미니스트 분석에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사실 가족에 대한 텍스트만큼 재미없는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더니 가족만큼 ‘자연’스럽고 그렇기 때문에 변하지 않을 것 같고, 치열하게 싸우기 보다는 그 위력 앞에 무력해 지는 대상이 없더라구요. 그리고 가족에 대한 페미니스트 분석은 예리하지만 건조하고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저의 글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다른 페미니스트들의 글을 통해 그간 인식하지 못했던 사회 구조를 발견했을 때 받았던 놀라움과 충격이나 글에서 전해져 오는 감정으로 부단히 흔들렸던 경험, 혹은 미처 언어화하지 못했던 저의 경험들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 혹은 슬픔, 보다 복잡한 감정들을 떠올렸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아 부끄러운 글이지만 이 글이 여러분에게도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것이 제가 할 수 있는 가족 구조와 가족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아주 작지만큰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느 가족에 대한 에세이가 그렇듯, 가족의 이면을 들추면 마주치는 현실이 그렇듯, 이 에세이는 전혀 유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 나타난 슬픔과 외로움, 분노는 결코 제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족 구조를 들여다보면 어느 가족에서나 일어났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보편적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가족에 대한 환상이나 가족 이데올로기를 넘어 가족의 이면이나 새로운 친밀한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2013. 4. 3.
백목련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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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선택할 권리1)
백목련
서강대 여성학협동과정 석사과정
(w.magnolia99@gmail.com)
1) 이 제목은 파이어스톤이 그의 저서 『성의 변증법』 중 ‘결론’ 부분에서 언급한 ‘아이들에게 자신의 가족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한 것에서 따왔다. S. 파이어스톤, 김민예숙 역, 『성의변증법』, 풀빛, 1983.(S. Firestone, The Dialectic of Sex , Willian Morrow and Company, Inc., 1970.)
"난 미국 사람이야."
라며 사촌동생 A가 한국 음식 먹기를 거부했을 때 문득 나를 스쳐간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몇 년 전 고모부가 미국의 한 대학으로 박사 과정을 진학하게 되자 고모네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A가 세 살이던 해에 떠나서 올해, 그 친구가 여덟 살이 되는 해에 되돌아 왔으니 자신을 미국 사람이라 생각할 법도 했다. 따져보면 밥을 먹지 않는 것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 불과했다. 한 번은 핫도그를 먹으면서,
"이거 뭐야? 왜 붙어 있는 거야?"
"뭐? 깨? 이거 먹으면 건강해지라고 그랬겠지."
"한국 사람들 이상해."
깨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한국이 이상하다는 것, 그제서야 미국을 떠나온 것이 문제였다고 짐작하게 되었다. 고모와 고모부에게는 한국이 돌아가야 할 그리운 곳이고 아직 엄마 옆에서 떨어진 기억이 없는 4살짜리 동생에게는 미국이든 한국이든 엄마 옆에만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었겠지만 A는 많은 것을 미국에 두고 와야 했다. 누구와 만나는지, 어디에, 어떤 환경에 사는지, 어떤 말을 쓰는지, 무엇을 먹는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잘 때까지 계속 낯선 것들과 부대껴야 하는 상황. '하루아침에 바뀐 일상'이라는 것의 의미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단순하게 바뀐 환경에 적응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2
아무도 없는 집 안, 창문 앞에 서서 커튼을 부여잡고 멍하니 보낸 시간. 꽤 오랜 시간 동안 내가 떠올린 어떤 사람들. 누군지 얼굴도 전혀 기억나지 않고 어깨 아래로의 몸만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희미한 기억.
3
아빠, 아빠의 여자친구와 살다가 갑자기 부산에 있는 친가로 내려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
"혜영아!"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 몸이 일어나지더니,
"이모?"
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내 이모인가? 내가 이모라고 부른 아줌마를 따라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갔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반겼고 좋아해 주었지만 너무 낯설었다. 어떤 곳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장소와 사람들. 몇 번을 다녀와서야 내가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편하다는 것을 알았다. 낯설지만 익숙한 그 집의 냄새, 그 집에서 먹는 밥, 그 집의 분위기, 그 집의 사람들.
4
아직도 그날 밤을 잊을 수 없다. 할머니는 목욕탕에 가고 할아버지는 잠깐 자리를 비웠던 여섯 살의 어느 날 밤. 연락도 없이 찾아온 아빠는 자기를 따라가자고 했다. 불안했던 나는 할머니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며 싫다고 둘러댔지만 아빠는 계속 졸랐다. 이길 수 없었다. 곰인형 하나만을 안고 따라 나섰다. 그때까지도 아빠를 따라나서는 것이 내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전혀 알지 못했다. 차 뒷자석에 앉아 졸다 깨기를 수차례 반복하고서야 도착한 어느 깜깜한 건물로 들어갔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여자친구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아빠와 아빠의 여자친구가 일하러 나간 동안 여섯 살짜리가 갈 수 있는 유치원은 많지 않았고 들어갔다 해도 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켜 쫓겨나기 일쑤였다. 대부분의 시간은 집에서 보내다 차츰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동네에 나와서 아이들을 기다렸고 제일 늦게 집으로 들어갔다. 나를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잠들 때가 되어서야 아빠나 아빠의 여자친구가 집에 들어왔었다.
티비도 없었고 전화나 편지를 쓸 줄 몰랐던 그때의 나는 창문 앞에 서서 멍하니 있는 것을 좋아했다.
5
학교에 가고 전화를 쓰는 방법을 알게 되자 친가에 연락할 수 있었다. 친할머니는 혹시나 내가 아빠의 여자친구한테 구박 받을까봐 책이나 옷, 편지와 함께 배를 갈라 동전을 잔뜩 넣은 강아지 인형을 몰래 넣어서 보내주었고 나는 그 돈을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심심할 때는 집 앞 공중전화에 가서 아빠 직장에 전화하기도 했고 친가에 전화해 간간히 내가 필요한 것들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나 아빠는 물론이고 누구에게도 외가에 대해서 물을 수 없었다. 왠지 물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전화번호는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을 더듬어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삐뚤빼뚤한 어린아이 글씨로,
받는 사람
부산에 있는 우리집인데요, 사하역 근처에 큰길에서 조금만 들어오면 미용실하고 피아노학원 사이에 있는 골목에 계단이 엄청 많거든요? 쭉 올라가면 집이 네 개가 있는데 오른쪽 두 번째 주황색 대문집에 꼭 주세요.
'할머니, 할아버지, 나 여기 잘 있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만 그것이었다. 내가 여기 있다, 정말 별거 아닌 말이었다. 나를 데려 오라는 말도 아니었다. 왜냐면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엉터리 주소를 적은 편지가 외가로 갈 리가 없었고 고민 끝에 나는 그 구구절절한 주소와 함께 우리집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편지는 되돌아왔고 다시는 외가에 편지를 보내려 애쓰지 않았다. 그 때,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외가 가족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을 접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그 사람들이 누군지 기억하지 않게 됐는지도 모른다.
6
초등학교 2학년 봄방학 때 깜짝 선물처럼 혼자서 친가에 갔다 오려고 했었다. 나는 서울과 부산이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친구들도 어디 놀러 가고 없는 봄방학 일주일을 혼자 보내기 싫었다. 무엇보다 내가 갑자기 친가에 나타나면 다들 엄청 똑똑하다고 칭찬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에 큰 도로를 다닐 때 어느 버스가 터미널로 가는지 유심히 잘 봐뒀다. 세뱃돈은 충분히 남아 있었고 봄방학 첫 날 나는 곰인형과 속옷 몇 장을 챙겨 좌석버스를 탔다. 정류장에는 잘 내렸지만 길 건너편 버스 터미널로 가는 지하도가 너무 복잡해 결국 그 근처를 서성였다. 어린 아이가 혼자 있는 것을 이상하게 본 아줌마가 나를 경찰서로 보냈다.
그날 밤, 아빠와 그 여자친구는 크게 싸웠고 며칠 후 친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때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나에게 네가 어디로 옮겨갈 것인지,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 거기가 왜 외가가 아닌지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았다. 다만 부산에 내려간 이후로 내가 혼자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7
엄마가 죽기 전에도 나는 주로 외가에서 지냈다. 직장 생활에 바빴던 엄마, 아빠를 대신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늘 내 옆에 있었다. 엄마가 죽고 나서도 나는 외가에 있었다. 아빠는 따로 지내고 한 번씩 들렀던 것 같다. 이모들은 내가 어릴 때 할머니가 안 보이면 여기저기를 다니며 할머니를 찾았다고 했다. 내 일상의 대부분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이 었고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8
지난한 세월을 보내고서야 그때 창문 앞에서 애써 기억해보려 했던 얼굴 없는 사람들이 바로 할머니, 할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내가 이모나 다른 외가 가족들을 다시 만났을 때 기억하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는지, 내 안에 잔잔히 흐르는 외롭고 슬픈 감정들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어린 나에게 누가 가족이었는지의 것들을 우습게도 이제야 그 조각들을 맞춰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네 살 때 엄마를 잃었고 여섯 살 때는 가족과 헤어져야 했다. 그리고 다시 아홉 살때 또 전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내 삶을 시작해야 했다. 죽고 사는 것이 사람의 손을 떠나 있는 문제라면 가족을 선택할 권리, 그러니까 어디에서, 누구와 살지에 대한 결정권은 적어도, 내게, 주어졌어야 했다. 누구도 내게 누구와 살 것이냐 거나 어디서 살 것인지에 대해서 ‘당연히’ 묻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나의 ‘가족’이었고 그것은 내 삶을 이리 저리 바꿀 수 있는 결정권을 가진 ‘어른’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들을 감당하느라 너무 오랜 시간을 외롭게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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